2017.02.14 [Voice of MWTV] 겨울을 건너는 길 위에서_독일과 한국을 떠돌며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한 구소련인의 이야기
소통과 고통 201702
겨울을 건너는 길 위에서
-어느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한국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정수창 | 이주민방송MWTV 운영위원
산에서 내려온 ‘짜라투스트라’가 처음 만난 이는 줄 타는 광대였다. 지상에서 높이 떠 있는 외줄 위에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길 아닌 길을 위태롭게 한 걸음씩 내딛는 광대의 모습은 우리의 척박한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지난 2016년 여전히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법칙인 듯 보였다.
모든 것이 유난했던 지난 한해 내 발걸음은 여전히 비틀거렸다. 어지럽게 지나온 자취마다 함께 휘청거리던 이 사회를 응시하는 일은 언제나 새로운 고통이었다. 철 지난 상처들은 아무는 일을 잊은 듯 했고, 더러는 다시 터졌으며, 새 살이 돋을 사이도 없이 또 찢어졌다. 인간의 역사는 많은 것들을 변화시켜왔지만, 인간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순 없는 듯 무력해 보였다. 첨단의 공법으로 포장된 약육강식의 세상엔 여전히 포식자들이 군림했고, 겨울은 유난히 날선 바람을 앞세우고 닥쳐왔다.
겨울을 지나는 길 위에서 평생 겨울을 걸어야 했던 한 사내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1954년 키르키즈스탄에서 태어난 그는 그 흔적만 역사에 남아있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국민이었다. 14살이 되던 해부터 건설현장에서 삽자루를 쥐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동안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직업대학에서 ‘건축전문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5년의 시간을 더 견뎌냈다고 들었다. 그 사내의 나이 19살 때부터라고 했다.
직업대학 5년 과정 수료해도 국내 일자리 없어
7년의 독일 이주노동 끝에 결국 추방 당해
1991년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 개혁)’와 ‘글라스노스트(정보·언론 개방)’의 여파로 마침내 키르키즈스탄은 독립을 맞이했지만,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모국의 현실은 그 사내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했다. 그런 까닭에 7년 여를 고향을 떠나 독일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갈수록 이주노동자에게 냉담해지는 유럽의 분위기에 의해 결국 추방당하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그렇게 기나긴 겨울을 가로지르는 사이 그의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늘어난 가족과 병든 부인이 그 사랑만큼의 책임으로 그를 짓눌렀다. 모국(키르키즈스탄)의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그는 또 다시 타국으로 이주노동의 길에 올라야 했다. 그 도착지는 대한민국이었다. 기술과 경험이 있었기에 처음에는 작업환경과 보수가 좋았다고 했다. 얼마간 고생하면 모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으리라는 꿈이 그의 팔뚝에 힘을 더했고, 더운 땀을 식혀주었었다. 잠시 봄볕은 따뜻했고, 모든 희망은 합법적이었다.
다시 오른 이주노동의 길, 대한민국
부인 치료비 6천만 원에 물거품이 된 희망
하지만, 그 사내는 이내 다시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병세가 깊어진 부인에 대한 걱정으로 모국까지의 먼 길을 여러 차례 왕복해야만 했다. 여비는 만만치 않았고, 그동안 모았던 수입은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다. 열악한 현실은 결국 그를 미등록 노동자로 한국에 남게 했다. 2년 전 부인을 데려와 한양대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를 받게 했다. 치료비로 6천만 원 정도를 썼다고 했다. 모아두었던 4천만 원과 2천만 원의 대출로 치료비를 감당했다고 들었다. 현재 1천만 원은 상환했으며, 남은 1천만 원의 빚을 책임지기 위해 여전히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이 땅에 발 딛고 있다고 했다.
희망이 아닌 시지프스의 형벌이 되어버린 ‘노동’
‘불법체류자’의 신분은 사내의 작업 환경과 보수를 갈수록 악화시켰다. 줄어든 수입을 만회하고자 노동의 강도와 빈도를 늘려야 했다. 주중에는 노깡(토관) 제조회사에서, 그리고 주말에는 경기도 인근의 농장에서 일당을 받아가며 쉬지 않고 일을 해도 빚을 갚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졌다고 했다. 그에게 노동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닌 듯 했다. 그저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시지프스의 형벌인 듯 보였다.
얼마 전 출입국관리소의 단속을 피하지 못한 그 사내는 현재 보호소에 있다. 그의 됨됨이를 아끼는 많은 이들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강제추방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전히 그는 1천만 원의 못 갚은 빚만을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내의 이름은 ‘마하마트’다.
문득 인간이 종으로서 다른 유인원과 구별되던 먼 옛날부터 ‘인간의 역사는 곧 이주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유럽으로, 중동으로, 아시아로, 아메리카로…오랜 시간 기나긴 이주의 여정을 거쳐 왔다. 그 힘겨운 여정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듯 여겨진다. 구한말 북간도로, 연해주로 떠나던 발걸음들, 60~70년대 정든 고향에서 도시의 그늘 속으로 내몰리던 발걸음들, 오늘날 보다 저렴한 주거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내몰리는 발걸음들은 ‘마하마트’ 그 사내의 여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떠나는 건 언제나 약자들의 몫이었다. 가진 것 없는 ‘그’ 또는 ‘그녀’들은 오늘도 추운 겨울 속으로 위태로운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
하지만, 또 다시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날 선 바람을 거스르던 마주 잡은 손의 온기와 비틀거림을 잡아주던 함께 걷는 이들의 발걸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겨울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던 ‘그’ 또는 ‘그녀’들은 함께 선 그날 비록 가진 것 없어도 약자가 아니었다. 태양은 여전히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기울지만, 지구에 몸을 실은 우리는 9억km가 넘는 험난한 여정을 다시 견뎌냈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팽창하는 우주를 따라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