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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9 ‘시민=기자’로 살아가기 위한 진지한 대화

이주민방송MWTV 2023. 3. 10. 21:23

‘시민=기자’로 살아가기 위한 진지한 대화

 

하금철 |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편집장

이 글은 지난 6월 18일에 있었던 MWTV 기자단 교육 4강 ‘취재기자이야기’편을 위한 교육자료로, 장애인언론 비마이너 하금철 편집장님이 MWTV 새내기 기자들을 위해 보내주신 글을 허락을 얻어 공개합니다.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언론, ‘시민다움을 갖춘’ 언론으로서 되새겨야할 근본적인 물음들, 깊이있는 성찰을 나누어주신 하금철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부)

MWTV 기자단 활동을 시작하신 여러분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런 자리엔 저보다 더 훌륭한 활동을 해 오신 분들이 오셔서 좋은 말씀을 해주셔야 할 텐데, 부족한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저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기자라는 위치에서 글쓰기 행위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이라도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몇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1. 시민기자

 

저는 ‘시민기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요즘 같은 세상에는 시민기자를 찾아보기가 어렵기에 시민기자를 갈망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민기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니!?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매체에 매일같이 올라오는 기사들 중 상당수가 시민기자들에 의해 쓰여진 글들인데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물음은 ‘시민기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직업 기자가 아닌 기자’ 또는 ‘아마추어 기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시민기자는 프로-아마추어의 구분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시민다움을 갖춘 기자’인가 아닌가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럼 대체 시민다움을 갖춘 기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는 역으로 ‘시민다움을 갖추지 못한 기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쉽게 말하자면 ‘기레기’말입니다. 기레기란 어떤 사람입니까? 인터넷 위키백과에서는 기레기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레기는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대한민국에서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과 그 사회적 현상을 지칭한다. (…) ‘기레기’라는 신조어는 201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 네티즌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인터넷 뉴스에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4월, 미디어스가 네이버의 뉴스스탠드 기능을 비판하는 기사를 올리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네이버가 뉴스스탠드 기능을 선보임으로써 언론사들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본문 내용과는 다르게 제목을 자극적이고 동떨어지게 올릴 것이라며 이에 따라 온라인 저널리즘의 위상이 추락하고 기자들의 인지도가 바닥을 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기레기를 설명하는 말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위 인용글에서는 기레기의 핵심을 ‘전문성의 결여’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레기가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비전문가라거나 무능해서라기보다는, 기자라는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로, 세월호 참사 당시 KBS기자들이 기레기라고 욕을 먹었던 것은 참사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던 일부 권력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지 않도록 사실을 왜곡하고 부당한 방식의 보도를 일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KBS기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특정 권력 집단의 사적 이익에 봉사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언론의 소명이라 할 수 있는 바람직한 ‘공론(public opinion)’을 형성하는 역할을 방기한 것입니다. 이 또한 어떤 면에서는 전문성의 결여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들은 사적 권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데는 대단한 전문가였던 셈이죠. 또 다른 대표적 기레기스러운 행동으로 일컬어지는 어뷰징(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같은 기사를 제목이나 내용만 조금 바꿔 반복으로 전송하는 행위) 또한, 인터넷 공간의 건강한 공론장 형성이라는 공익은 내팽개치고 오로지 언론사의 광고 수익 증대라는 사익을 위해 복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업으로서 기자 일을 하고 있는 제가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건 낯 뜨거운 일이지만, 흔히 기자를 ‘지식인’ 또는 ‘지성인’이라고 부릅니다(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레기’들은 자신의 지성 또는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는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을 구분합니다. 이를테면 성직자가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교황이 어떤 부당한 지시를 내렸을 때, 이를 정해진 규율의 명령에 따라 순응하고 그저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부당한 지시를 그저 따르기보다는 이를 세계의 대중(public)을 향해 알리고 그 부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1) 이처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민다움의 덕목이자, 시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사실 민주주의 정치를 처음 실행에 옮겼다고 이야기되는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도 단지 신분적 자격(노예, 여성, 외국인이 아닌 남성)을 갖추었다고 자동으로 시민이라고 불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군주정치의 폭정에 맞서 끊임없이 자기 주장을 대중을 향해 전하고 싸우는 사람들에 의해 확립되었고, ‘시민’이라는 이름도 그 싸움 끝에 비로소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자 또한 말과 글, 영상 등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세계의 대중을 향해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많은 기자들은 대중을 향해 무언가 말을 할 때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시민의 덕목을 져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건 직업 기자냐 아마추어 기자냐 하는 것과 무관한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날 바람직한 ‘기자되기’는 ‘시민되기’에 다름 아니며, 시민이라면 누구나 기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에게 요구되는 취재의 기술적인 역량, 글쓰기의 테크닉 등은 그가 충분히 ‘시민’이라면, ‘기자되기’에 있어서 그저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MWTV 기자단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여러분 또한 바로 그런 ‘시민기자’가 되려 하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 기자의 글쓰기는 ‘정치적 행위’

 

달리 말하자면 기자의 글쓰기란 시민으로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애초에 시민공동체라는 것이 정치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치라는 것은 국회의원들이 정치적 거래를 주고받는 그런 류의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누구의 말을 들어주고 누구의 권리를 승인할 것인지의 문제,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언론은 그런 논의가 끊임없이 일어나서 시민들이 정치 행위를 이어가도록 무대를 깔아주는 역할을 하는 장소입니다.

 

감히 말해보건대, ‘정치행위로서 기자의 글쓰기’라는 것이 MWTV와 같은 소위 ‘소수자 매체’에 갖는 의미는 좀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제가 장애인언론이라는 또 하나의 ‘소수자 매체’에서 일하고 있기에 이미 체감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게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여러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공론의 장에서 장애인은 사실상 발언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일부 정신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의 경우 사고능력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성인이 되어서도 투표권에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성년후견제도). 또한, 수십 년째 장애인 시설 내에서의 폭행과 사망 문제가 빈발하고 있지만, 이런 문제가 대표적인 공론 영역이라 할 수 있는 TV토론 프로그램에서 다뤄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애인의 목소리는 대부분 묻혀버리거나, 장애인 당사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특정 사건에서 피해자 또는 가해자로만 이미지화되기 일쑤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강남역 인근에서 벌어진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언론의 보도 행태입니다. 경찰 당국과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의 피의자가 정신질환 병력(조현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건 자체를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로 몰고 갔고, 나아가 정신질환자 전체를 예비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실제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이 일반 국민 범죄율의 1/10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음에도 언론은 대중의 불안 심리에 기대어 정신질환자에 대한 악마화를 자행했습니다.2) 이런 보도는 특정한 집단을 향해 ‘상징적 폭력’을 가하고, 그 결과 이들을 정치공동체 외부로 철저하게 배제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이때 정신장애인이 하는 말은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어도 그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더 이상 아니게 되고, 그저 공포의 언어, 불안의 언어로 취급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는 어쩌면 정치공동체가 갖는 근본적인 모순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시민이 하는 것입니다. 시민이 아닌 자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누가 시민이고 누가 시민이 아닌지를 판단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인이 아닌 외국인을 시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어로 말하지 못하고 그저 ‘바르바르’ 거리기만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외국인을 ‘바바리안(barbarian,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장애인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바바리안’으로 내몰린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이주민의 정치적 위치 또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단편 영화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서 나타난 것처럼, 한 네팔 여성이 지갑을 잃어버린 채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녀가 한국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을 한다는 이유로 무전취식 혐의로 잡혀가고 결국 행려자로 처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게 한국사회입니다. 또한 2012년 4월 수원에서 발생한 ‘오원춘 사건’ 이후 여러 언론이 이주노동자 집단 전체를 예비범죄자 취급하는 보도를 쏟아냈던 것을 생각하면, 이주노동자 역시 우리 사회에서 非시민의 자리로 내몰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마이너와 같은 장애인언론, MWTV와 같은 이주민언론이 행하는 글쓰기 행위는, ‘누가 시민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정치적 질문에 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민=기자’로서 우리의 활동은 바로 이 첨예한 정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시민=기자’는 끊임없이 시민의 자격을 묻고 경계 지으려는 사회를 향해, 그 경계를 확장하고 나아가 경계 자체를 무너뜨릴 것을 제안하는 일종의 활동가(Activist)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듣지 않으려는 목소리를 끈질기게 경청하고 대화하고 기록하면서, 경계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활동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자는 그런 시민다움을 갖춘 사람입니다.

 

3. 정치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너무 딱딱한 주제로만 이야기를 했으니 잠시 말랑한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여러분은 왜 기자를 하려고 하십니까? 지금이야 일정 기간 기자단 형태로만 참여하는 것이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장기적으로 기자의 꿈을 키우게 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게 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잠시 제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장래희망’을 적는 란에 ‘기자’라는 단어를 채워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글을 통해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은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기자 일을 하기 전에 3년간 일했던 장애인단체에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글로 뭔가를 남기려 했고, 회의 안건 하나 쓰는데도 (멋있게 쓰려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물론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일을 매우 요령 없고 무식하게, 또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그렇게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글을 통해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일 것입니다.

 

이러저런 힘든 일 때문에 그 장애인단체 일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마침 ‘그럼 비마이너 기자를 한 번 해보지 않겠냐’라는 제안을 받고 별로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 몹쓸 욕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기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나를 세상에 드러내고 그 결과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욕심 말입니다. 짐작건대 여러분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이런 공명심스러운 욕심이 조금씩은 있을 겁니다. 저는 기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이런 욕심이 없는 게 더 이상한 거라 생각합니다. 기자의 글쓰기 노동도 하나의 창작 활동이라 말할 수 있다면, 개인적인 욕심이 바탕이 되지 않는 창작활동은 없다는 의미에서 ‘욕심 없는 기자’란 말도 성립할 수 없겠죠.

 

하지만, 욕심을 갖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기자의 ‘창작활동’은 음악가, 미술가, 배우, 더 나아가서는 같은 글쓰기 노동을 하는 소설가, 시인의 그것과도 완전히 다른 종류의 활동입니다. 이들 다른 활동들은, 거칠게 말하자면 그 활동 동력이 매우 ‘사적인(private)’ 것입니다. 누구도 그 활동의 동기가 사적인 욕망 때문이라고 해서 비난하지 않으며, 그것의 결과물이 사적으로 전유 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원칙적으로 보자면 없습니다. 반면, 기자의 활동 동기가 개인의 욕심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드러낸다면 아마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기자의 활동은 ‘이성의 공적 사용’이어야 하고, 기자의 글쓰기 또한 ‘정치적 글쓰기’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자의 글쓰기가 ‘개인의 욕망과 공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기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글쓰기의 좋은 모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 바로 『1984』, 『동물농장』 등의 소설로 잘 알려진 조지 오웰(George Orwell)입니다. 그런데 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훌륭한 빈곤 르포르타주를 쓴 저널리스트였습니다.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글쓰기 철학이 잘 드러난 저작이 바로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인데, 그는 이 책에 실린 같은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조지 오웰의 빈곤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난 저작 『나는 왜 쓰는가』

 

이 글에서 조지 오웰은 자신의 글쓰기가 개인적인 욕망과 공적인 목적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갈등하는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갈등이자, 그 갈등을 잘 이겨낸 글이 진정으로 좋은 글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글을 쓰는 것을 글쓰기의 노하우와 스킬의 문제로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때로는 그런 스킬의 과잉이 글을 난삽하게 만들고, 때로는 보기 싫게 만들기도 합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 문법은 지켜야겠고, 부적절한 용어 사용은 피해야 하겠으며, 서론-본론-결론과 같은 형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배우는 소양입니다. 그런데 대학, 아니 대학원 이상을 나온 사람도 이게 잘 안 될 때가 많지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글을 예쁘게 꾸며주는 말, 미사여구, 풍부한 비유적 표현 등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는 조지 오웰의 입장에서 보자면, ‘허튼 짓’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에 집착하다보면, 자신의 생각이 글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관용어들에 둘러싸여 생각이 ‘선택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조지 오웰은 같은 책에 실린 <정치와 영어>라는 글에서 이런 말도 합니다.

오늘날 최악의 글쓰기는 (…) 누군가가 이미 정리해놓은 긴 어군(語群)들을 이어붙이고 순전한 속임수로 그것을 받아들여질 만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가 매력적인 건 그렇게 하기가 쉽다는 데 있다. (…)

사실에다 보드라운 눈을 뿌리듯 라틴어를 잔뜩 쓰면 요지는 흐려져 버리고 세부는 다 덮여 버린다. 명료한 언어의 대적大敵은 위선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숙어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대듯 말이다.

그저 원론적인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글의 기본은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특히 기자의 글에 있어서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세우는가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자가 누구의 목소리에 주목할 것인가, 그리고 그 목소리를 통해 이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느냐가 글의 뿌리이고 몸통입니다. 그것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조지 오웰의 말처럼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관용어와 미사여구들이 글 속으로 들어와 ‘먹물’을 뿜어댈 것입니다.

 

제가 요청받은 주제가 ‘취재기자 이야기’이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에 비추어 봤을 때 구체적인 취재 방식, 인터뷰 수칙 등은 다소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자의 활동이 개인적인 예술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라는 집단 내에 모인 구성원의 협업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구체적인 취재 방식도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논의할 때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타인에 대한 경청의 자세 정도를 갖추면 충분히 바람직한 취재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만, 우리가 시민이자 동시에 기자로서(시민=기자)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런 가치를 일상화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시민으로서 제가 기자단 활동을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전하고픈 제안이자, 저 스스로에게도 전하는 다짐입니다. 감사합니다.

1)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참조.

2) 이런 언론 보도 행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비마이너의 기사 <언론은 어떻게 정신질환자 범죄를 만들어냈는가?>(2016.06.03)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