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 [기획취재] 2018년 제주 예멘 사태 이후의 이야기들 시리즈 첫번째 <평화의 시작은 문을 여는 것>
[2018년 제주 예멘 사태 이후의 이야기들 시리즈 첫번째]
평화의 시작은 문을 여는 것
2018년 대한민국은 광장이 뜨거웠다. 한쪽의 사람들은 “국민이 우선이다” 라고 외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난민을 환영한다” 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적인 갈등은 2018년 제주도에 도착한 500명 가량의 예멘 난민들이 법무부 출입국에 의해 ‘출도 제한’이 되면서 불필요한 논란의 시작이 그 원인이 되었다. 이후 혐오세력들의 발언들과 행동들은 예멘 난민이 제주도라는 섬을 벗어나 소위 육지로 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오직 5명만이 인도적 사유로 제한 해제를 받았으며, 나머지 492명은 출도제한이 되었다. 난민심사 또한 대부분 인도적체류자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끝났고, 극히 소수의 예멘 난민이 난민 인정자가 되었다. 이후 2020년 현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예멘 난민은 마치 잊혀진 존재 마냥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이주민방송MWTV의 웹진 VOM이 새삼 이들의 삶이 궁금해진 건 왜일까?
그것은 난민을 받아들였고, 여전히 200여명이 훌쩍 넘는 예멘인들이 출도제한에 붙잡혀 제주도에 살고 있는데 혐오세력이나 일부 폐미니스트의 우려와 달리 그야말로 이들에 대해 제주도는 조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용한 이유가 어느새 제주도민의 삶 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살기 위해 침묵하고 있는 난민의 위치 때문인지 너무나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웹진 VOM은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제주도로 찾아갔고,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풀어내 보고자 한다. 그 첫번째가 인터뷰에 응해 준 민경님과 아민님의 이야기이다. 둘은 현재 평화라는 뜻의 아랍 음식점인 아살람(ASALAM)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이다.
“저는 그저 문을 열어주었을 뿐이예요!”
2018년 5월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SNS에서 ‘예멘이라는 나라에 전쟁이 났는데 전쟁을 피해서 온 여러 명의 남자들이 노숙을 하고 있으며 잠잘 곳이 필요하다’라는 메시지를 봤어요. 제가 국악 전공자(풍물)여서 연습실로 쓰는 스튜디오가 있었어요.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연습할 때만 필요하고 사용하지 않고 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15명 정도 사용이 가능했고, 간단한 음식조리도 가능하다고 여겨서 연락을 했습니다. 그렇게 온 예멘 난민들이 일자리를 구하면 나가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했는데, 최대 30명까지 지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스튜디오에 예멘 난민 150명 정도가 거쳐갔고, 더 시간이 지나니 400명 정도 왔다 갔다 하면서 공간을 이용했어요.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겠다는 청년 활동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한글을 배우는 장소로도 이용을 했어요. 그래서 예멘 친구들은 저를 처음으로 문을 열어준 사람이라고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길에 지나다닐 때 고양이가 비 맞고 있으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이 비 맞고 자고 있다는데, 문만 열어주면 되는 거라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을 여니 알려지기 시작하고 활동가들이 찾아와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하기도 했고, 음식을 보태기도 했지요. 또 적십자 같은 곳에서 와서 구호물품을 주기도 했지요. 처음에 한 말처럼 저는 그저 문만 열었을 뿐인데 다른 분들이 오셔서 다 해주셨어요. 문만 열어 주면 다 되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3개월을 개방했어요.
실제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 혐오 세력의 말과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문을 열었을 때는 그렇게 이슈가 크게 되지 않았을 때 였습니다. 정말 멋모르고 문을 열었어요. 아마 저도 그런 혐오 댓글들을 봤더라면 문을 열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실제 제가 만난 사람들은 그 혐오 세력의 말들과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댓글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전쟁을 겪은 후 외상 후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이 음악이 있으면 춤을 추고 함께 놀았어요. 사람들은 전쟁을 겪고 왔잖아요. 바로 옆에서 폭탄이 떨어져서 어떤 사람들은 딸을 잃었고, 어떤 사람들은 엄마를 잃었지요. 어떤 사람들은 트라우마 때문에 잠을 못 자지만 음악을 틀어주면 춤을 추었어요. 당시에 제 나름대로 큰 고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반대로 제가 치유가 되었지요. 친구들 덕에 치유되었고, 이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들로 인해 오히려 행복해졌고 즐거웠어요.
문화가 뿌리내리는 데 가장 좋은 것이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에 ‘와르다(WARDA)’라는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는데요. 예멘 사람들이 제주도에 아랍 음식을 하는 곳이 없다며, 꼭 이런 음식점이 필요하다며 누나가 열어주면 안되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필요하다고 해서 열어야만 될 것 같았죠. 그래서 여니까 좋은 남편이 생겼어요. 이후 결혼 후에 동업하던 와르다에서 나와서 아살람 레스토랑을 만들게 되었어요. 그리고 기도실을 만들어서 예멘 무슬림 난민들이 꼭 음식을 사먹지 않아도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열어 놓았지요. 물론 예멘 사람들에게만 개방된 것은 아니고 무슬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만의 레스토랑을 차리면서 넓은 주방을 갖게 되어 다양한 아랍 음식들을 메뉴로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국, 한국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 오는 곳이 되었어요. 저희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알고 오시는지 많은 사람들이 오시고 있어요. 너무 바쁘지만 좋아요. 문화가 뿌리내리는 데 가장 좋은 게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음식을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제가 느끼기에는 아랍 음식을 처음 먹었는데 진짜 맛있다고 하는 거죠.
아랍 음식점을 열었더니 아민이라는 좋은 남편을 만났어요!
저희가 결혼을 한 사이인 걸 아는 분들이 어떻게 예멘 난민과 결혼했냐고 물으시곤 하는데요. 저는 그렇게 말해요. 저는 예멘인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저는 아민이라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라고요. 와르다 레스토랑을 처음 열게 되었을 때 예멘 친구들이 좋은 쉐프가 있다면서 아민을 소개 주었어요. 그래서 함께 일하게 되었고요. 아민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고요. 이런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아민을 본 저희 부모님도 아민을 잡아라 하시면서 결혼하라고 하셨죠. 사실 저 마흔이 넘었고 결혼을 아예 생각하고 있지 않던 사람인데, 아민을 만나고 나서 결혼이 하고 싶게 되었죠. 그래서 한국식으로 한 번 예멘 식으로 한 번 이렇게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어요. 예멘 친구 중에 변호사가 있어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주었고, 예멘의 문화에 따라 결혼할 때 저희 부모님은 아랍어로 외워서 답을 다하시고 서류에 사인해 주셨어요. 아민이 저와 결혼한 이유는 내가 천주교인데 종교인이어서 결혼하려고 했다고 해요. 저도 이슬람에 대해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와 교육의 무지함 때문이죠!
무슬림을 접해 본 적도 없고, 접해 봤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직 TV에서 보도하는 폭탄 테러범 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한국사람들은 나쁜 이미지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교육의 무지함 때문이죠.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이슈가 있을 때나 그렇지.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 같아요. 별일 없네 그러는 것 같아요. 그때는 전화가 많이 와서 귀찮았어요. 지금은 안 와서 편해요. 못된 사람들은 오히려 찾아오지도 못해요. 그런 사람들은 얼굴도 못 내미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후
사실 민경님과 아민님을 만난 건 2019년 겨울 1월의 제주여행 때문이었다. 제주 예멘 난민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검색을 통해서 와르다 레스토랑의 존재를 알게 되어 함께 간 지인과 함께 그곳에서 아랍 음식을 시켜 먹었다. 음식이 나오고 후무스(콩을 갈아 만든 요리)를 본 순간 그 자태에 흠뻑 반했고, 맛도 있었다. 다른 음식들도 맛있어서 먹은 후에, 와르다 레스토랑에서 당시 주방을 책임지던 아민님을 보면서 민경님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당시 그 둘이 지금처럼 결혼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이제 제주에 새롭게 아살람 레스토랑까지 아랍 음식점이 둘이나 된 것에 놀라웠다. 혐오 세력의 무수한 악의적 말들과 인터넷상의 댓글들이 있었지만, 민경님의 부모님은 오히려 이 둘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결혼까지 이르도록 했다. 그들이 만난 아민을 믿으셨던 거다.
아민님은 예멘에서 피난을 가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였고, 처음과 달리 말레이시아 정부가 호의적이지 않은데다가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고, 구해도 언어적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에는 난민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없어서 난민법을 가지고 있는 한국을 선택해서 오게 된다. 난민 심사 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체류비와 비행기표를 구매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인들의 무리 속에 아민님도 함께였다. 이후 출도제한으로 인해 제주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아민은 출입국에서 허용한 어업 분야에서 3개월을 이를 악물고 버티어 내었다고 한다. 당시 무슬림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선주들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주었고, 그것을 먹을 수 없어서 적은 양의 밥과 김치로 연명하였고, 뱃멀미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게 민경님이 처음 본 아민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아살람은 평화라는 뜻이다. 민경님이 한 일은 자신의 공간을 내어 준 일이다. 그 공간을 내어줌이 바로 환대이다. 자리를 내어주는 것. 머물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을 위한 시작이 닫힌 빗장을 여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이든 공간이든 말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바로 친구를 만나게 된다. 민경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멘에서 온 낯설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받아 들임으로써 그들을 정말 알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사랑은 피어나고, 평화가 찾아 온다. 그리고 다시 그 평화 위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꽃피운다. 그것을 직접 경험으로 보여준 것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무슬림 남성들의 강간 위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리고 일부 보수 개신교인들이 국민이 우선이라고 외치고 있을 때, 또 정부가 가짜 난민이라며 프레임을 짜고 편견과 고정관념을 퍼뜨리고 있을 때 누군가 평범한 한 여성은 자신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단지 전 문을 열었을 뿐 이예요”라는 그녀의 말은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그러나 열쇠로 연 그 문을 통해 많은 예멘 난민들이 존엄과 평화를 얻을 수 있었고, 제주도의 사람들 속으로 뿌리내리도록 돕는 일이 시작이 되었다.
아살람에서 아랍 음식을 먹는데, 양고기 요리가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한국과 아랍의 콜라보인가 싶어서 물었는데, 그녀가 “원래 예맨도 이런 뚝배기에 요리를 먹는데요. 그래서 저희가 아랍 음식을 뚝배기에 내오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우린 어쩌면 그 먼 옛날 가지고 있던 문화의 뿌리를 캐다 보면 비슷한 것 하나 둘쯤 나올 수 있다. 파키스탄에서 아빠를 아바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사이의 경계가 아니라 우리 사이의 사람을 기억한다면 그 사람이라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공존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낯선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이 아니라 환대로 맞이할 때 우리는 풍성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제주에 온 관광객들이 아살람을 물어 물어 찾아와서 그 음식을 먹고 행복해지는 경험처럼 말이다.
글•사진 | 정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