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그림자들의 섬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30년의 역사
얼마 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권리 투쟁을 다룬 영화 ‘그림자들의 섬’을 보았다. 영화는 담담한 인터뷰의 형식을 빌려 치열했던 근 30년간의 시간들을 화면으로 끌고 온다. 마치 먼 태평양 한가운데 고립된 작고 희미한 섬에 서서히 카메라가 다가가며 세세한 것들을 비춰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는 진행된다.
민주노조 설립, 노예에서 인간으로
영화에 따르면 87년 7월 ‘민주노조‘가 설립되면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노예 상태를 벗어나 인간이 되었다. 인터뷰어는 ‘그 이전의 삶은 인간이 아닌 노예였다’고 증언한다. 배를 만드는 일이 워낙 험하고 위험천만한 일인 데다가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작업 환경은 열악했고 노동 강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임금에, 제공되는 음식은 짐승들의 먹이 수준이었다. 더욱 심각한 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위험이 방치되고 있었는데도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가족을 부양해야만 하는 의무감에 위험을 감수하며라도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방치된 위험을 피하지 못하고 옆에서 죽어가도 노동 현장은 아무 일 없던 듯 일상으로 돌아갔고, 노동자들은 그저 죽은 자가 자신이 아닌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죽은 동료의 명복을 소리 없이 빌며 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2016년,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또다른 그림자들의 섬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근 30년이나 지내 온 2016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또 다른 그림자들의 섬을 본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들이 화려하게 변화된 사회 속에서 초라한 그림자가 되어 혐오의 섬에 깊숙이 고립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무관심과 배척의 대상으로, 혐오와 모욕의 대상으로, 노예의 모습으로 이 시대 우리와 같은 공간 속에 여전히 87년 이전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는 87년 이전으로 인권의 시간이 맞춰져 멈춰져 있다. 인권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이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JTBC 방송사의 ‘탐사플러스’라는 프로그램은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노예농장, 인권의 사각지대’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방송에서,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폭언과 폭행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마스크도 없이 농약을 뿌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들은 매일, 계약보다 훨씬 긴 근무시간을 초과근무 수당도 없이 일하면서도 농장주의 보복이 두려워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더 심한 경우는 감금이나 성폭행, 심지어 인신매매를 당하는 사례들도 보고되고 있다.
▲ JTBC ‘탐사플러스’에서 보도된 <외국인 노동자 ‘노예농장‘…인권 사각지대> (방송 2015.1.14.)
사업장 이동의 자유 없는 이주노동자, 현대판 노예의 삶
이주노동자가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지 않고 같은 곳에서 일을 계속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직장을 옮기려면 가해자인 농장주의 동의가 필요한데 악덕 농장주가 동의해 줄 리가 만무하고, 동의 없이 무단으로 농장을 나간다면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어 발각될 경우 강제로 한국에서 추방되기 때문이다. 추방될 경우, 한국에 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지불한 돈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되는데, 그 돈을 가난한 자국에서 갚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사정이니, 이주노동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에서 87년 이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고용허가제는 합법화된 노예제도
이런 상황은 현재 이주노동자의 처우를 정한 고용허가제의 불평등한 고용조건에 기인한다. 고용허가제는 12년 전인 2004년, 문제가 많던 ‘산업연수생제도’를 보완하여 만들어진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인데, ‘산업연수생제도’를 보완했다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 개정의 목소리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피고용인인 이주노동자가 고용인인 한국 기업가나 농장주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농업이 갖는 특수성을 인정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분야보다 더 많은 부분이 사용자의 편의와 편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종속의 정도가 훨씬 심하다. 이런 법률 탓에, 고용허가제를 기반으로 한 불평등한 고용관계는 고용인의 양심과 감정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합법적으로 유린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한다.
이주노동자의 존엄한 인권이 법제화되지 않은 사회
이주노동자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사실을 단순히 선주민과 이주민 개인의 일로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니다. 이주노동자, 그들에게는 훼손당하지 않을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세계인권선언문 中). 누구도 그들의 인권을 훼손할 권리가 없다. 이런 인권의 훼손은 87년 이전에도 심각한 범죄행위였지만 행해졌고, 아직도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대상을 바꾼 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공평해야 하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이주노동자의 인권 보호가 법제화되지 못하고 오로지 고용인의 개인적 성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심하게 독선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다.
뿌리깊은 순혈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어떻게 법적·제도적 장치가 제법 갖추어진 사회에서 합법화된 노예제도가 버젓이 법률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을 수가 있는가?
이주노동자들이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순혈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기인한다. 이 두 가지가 고용허가제에 불평등의 모습으로 녹아 있어 사용자 중심의 일방적 고용관계를 사회적으로 용인하게 하고, 사용자로 하여금 이주노동자의 인권유린을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적 약자이자 소수자인 이주노동자들을 인권의 사각으로 몰아 노예 상태를 조장하고 방기하게 하는 것은 첫째가 잘못된 법체계 때문이며, 둘째가 잘못된 법에 의한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소수자들의 연대로 보편적이고 평등한 법을 확보해야
이주노동자의 문제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자본에 끌려가며 정의를 잃어 가는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정의를 심을 수 있을까?
87년 당시 한국사회는 6월 항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누르고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한 곳으로 힘을 모으던 시기였다. 고립된 채 망망대해에 떠 있던 수많은 그림자들의 섬들에 뱃길이 열리고 다리가 놓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연대의 끈이 이어지던 시기였고, 그림자들이 일어나 몸을 얻고 감각과 웃음을 다시 찾는 승리의 시기였다. 한진중공업도 그간의 치열하고 피나는 싸움을 일시적이나마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사회의 분위기에 힘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는 서로의 힘을 모으고 작은 승리들을 거둬 나누는 연대가 필요하다. 87년도는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연대했다면, 이제는 인권의 쟁취를 위해 서로 연대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 모든 소수자의 인권회복을 위한 소수자들 간의 연대,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보편적이고 평등한 법을 확보해야 한다.
돈보다 사람의 가치가 서는 사회를 향해 연대 절실해
인권은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자세를 견지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은 화합과 합의를 낳을 것이며, 화합을 전제로 한 합의는 자본의 횡포로부터 자유를 줄 것이다. 자본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을 때 비로소 사회가 도덕적으로 바로 서고, 고른 분배가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시대의 모든 사회적 문제들이 자본의 탐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 땅을 딛고 있는 누구에게나 생존권, 교육권, 주거권 등 기본적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향해 화합하고 연대해야 함이 절실해진다.
돈보다 사람의 가치를 굳건히 세워야 이 시대 그림자들의 섬은 사라질 것이다.
김대용 | MWTV 이주민방송 운영위원, 더불어꿈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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